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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시티 빌드잇/콘테스트 본부 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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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 (Sigismund of Luxembourg)의 생애



  • 왕가: 룩셈부르크 가문
  • 직위: 보헤미아 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 독일 왕
  • 외국어표기: žigmund Luxemburský
  • 공식칭호: 지기스문트(Sigismund)
  • 지역: 보헤미아
  • 재위기간: 1419년 ~ 1437년
  • 출생 - 사망: 1368년 2월 14일 ~ 1437년 12월 9일
  • 가족관계: 부친-카렐 4세(Charles IV, 1316년 ~ 1378년), 모친-포메라니아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Pomerania, 1347년? ~ 1393년)
  • 계보: 전임자-바츨라프 4세(Wenceslaus IV), 후임자-알베르트 2세(Albert)



1. 생애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지기스문트는 1368년 2월 14일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 1437년 12월 9일 모라비아 즈노이모에서 사망했다. 브란덴부르크 후작,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보헤미아의 왕, 로마의 왕, 롬바르드의 왕, 이탈리아의 왕,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역임했던 룩셈부르크 가문 최후의 남성 계승자였다.

그는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렐 4세와 포메라니아 출신의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폴란드 카시미르 3세의 손녀이며, 리투아니아 대공 데디미나스의 증손녀였다. 지기스문트라는 이름은 카렐 4세가 좋아했던 부르군디의 성 지기스문트에서 따온 것이며, 머리 색깔 때문에 유년 시절부터 ‘적갈색의 여우’라는 별명을 가졌다. 아버지인 카렐 4세가 사망한 이후인 1378년 브란덴부르크 후작이 되었다가 1388년 사촌인 모라비아의 욥스트에게 브란덴부르크를 넘겨주었다.

1411년 욥스트가 죽은 뒤에는 다시 브란덴부르크 후작이 되었다가 1415년 다시 뉘른베르크의 후작 프리드리히 1세에게 브란덴부르크를 넘겨주었다. 이를 계기로 호엔촐레른 가문이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가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렐 4세가 사망한 뒤에 이복형인 바츨라프 4세는 지기스문트를 헝가리로 보내 헝가리 왕실에서 헝가리어와 궁중예절을 배우게 했다. 이때 헝가리-폴란드 왕이었던 루이 1세는 6살에 불과했던 지기스문트와 자신의 딸 메리를 약혼시키면서 지기스문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여 헝가리 왕위를 계승하도록 약속했다.

1381년 13살이 되던 해 지기스문트는 다시 폴란드 크라쿠프로 가서 폴란드어를 배웠다. 지기스문트를 폴란드로 보낸 바츨라프 4세의 의도는 브란덴부르크 후작인 지기스문트를 통해 브란덴부르크와 폴란드를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2. 폴란드와 헝가리의 왕

1382년 헝가리의 루이 1세 사후 지기스문트의 약혼녀인 메리가 헝가리와 폴란드를 계승했다. 그러나 메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인 엘리자베스가 섭정을 했다. 지기스문트는 루이 1세가 생존해 있을 당시 자신에게 약속했던 대로 헝가리와 폴란드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약혼녀 메리와 장모 엘리자베스는 물론 헝가리 귀족들도 이에 반대했다. 폴란드 귀족들 역시 지기스문트의 폴란드 왕위계승에 반대했다.

엘리자베스와 귀족들이 타협을 통해 체결한 코시체 협정을 통해 1384년 루트비히의 딸인 야드비가 1세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했다. 1386년 폴란드 귀족들은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 대공 블라디슬라프 2세 야기엘로(요가일라)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향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연합이 결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383년 헝가리에서는 엘리자베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고르얀스키 가문만이 엘리자베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1385년 여름 지기스문트는 일단의 헝가리 대귀족들과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를 침공해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와 니트라를 점령했다. 당시 약혼자 메리를 포함한 헝가리 귀족 대부분은 지기스문트를 반대하고 있었다. 이 전쟁을 위해 지기스문트는 바츨라프 4세의 지원을 받은 대가로 브란덴부르크를 그에게 넘겼고, 브라티슬라바, 니트라, 트렌친 일부를 모라비아 후작인 프로코프와 욥스트에게 주었다.

1385년 가을 마침내 지기스문트와 메리가 부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크로아티아를 차지하고 있던 앙주가의 카렐 2세 단신왕이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고 나섰는데, 메리에게는 또 다른 적인 셈이었다. 북쪽과 남쪽 양쪽에서의 공격으로 위협을 느낀 메리는 북쪽의 적이었던 자신의 약혼자 지기스문트와 서둘러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로써 지기스문트는 메리와 함께 헝가리의 공동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한 이후 지기스문트는 헝가리를 떠나 보헤미아로 돌아와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1385년 12월 카렐 2세는 부다페스트를 공격했지만, 메리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고르얀스키 가문이 연합해 이를 막아냈다. 1386년 12월 슬로바키아 귀족인 블라제이 포르가치를 주축으로 한 헝가리 연합군이 카렐 2세를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카렐 2세는 2주 후에 사망했다. 1386년 봄 지기스문트와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4세는 헝가리를 공격해 죄르를 점령하고 협상을 통해 슬라브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슬로바키아)을 얻었다.

같은 해 7월 얀 호르바트가 헝가리를 공격했다. 호르바트는 자신의 아들 카렐 2세와 메리를 결혼시켜 헝가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이 전투에서 메리가 사로잡혀 수감되었다. 이때 보헤미아에 머물고 있던 지기스문트는 헝가리에서의 상황을 전해 듣고, 서둘러 헝가리로 돌아왔다. 지기스문트는 메리를 구해내고, 마침내 헝가리의 왕이 되었다.


3. 내외의 갈등

브란덴부르크를 사촌인 모라비아 후작 욥스트에게 주기로 약속하고 막대한 자금을 끌어다 쓴 지기스문트는 향후 불안정한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왕위 유지를 위해 지기스문트는 남작 협의체인 실레이-가라이 동맹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대가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상당 규모의 재산을 동맹에 넘겨야 했다. 지기스문트가 헝가리에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당시 헝가리의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헝가리 남부는 나폴리 백작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고, 지기스문트와 헝가리 귀족들은 여전히 갈등 관계에 있었다. 지기스문트는 귀족들을 회유하는 한편 자신의 친구이자 조언자 스티보리츠 가문의 스티보르를 데려와 헝가리 내정을 안정시키려 했다. 스티보르는 향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지기스문트가 귀족들의 반란으로 여러 차례 수감되었을 때 가라이 동맹과 함께 지기스문트를 구출해 주었다.

1389년 6월에는 헝가리와의 국경인 코소보에서 오스만제국과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를 계기로 향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그리고 여타 공국을 둘러싸고 헝가리와 오스만 튀르크가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1395년 헝가리 군대가 오스만 튀르크의 루마니아와 도브로지아 진군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튀르크는 계속해서 진군해 다뉴브 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교황 보나파시오 9세는 오스만 튀르크에 대항한 십자군 전쟁을 독려했는데, 헝가리에서 수천 명의 귀족들이 전쟁에 참여했고 유럽 각지에서 자원병들이 몰려들었다. 이중에는 프랑스의 용맹왕 존과 부르군디 필립 2세의 아들도 있었다. 지기스문트는 약 1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70여 척의 갤리선으로 선단을 구축했다. 불가리아의 비딘이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된 이후 지기스문트는 군대를 니코폴리스에 집결시켰다.


4. 니코폴리스의 패배

1396년 9월 28일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바예지드 1세는 콘스탄티노플 포위를 풀고 1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십자군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전사했고 수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중에는 슬로바키아 후작인 옐사바의 레우스타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오스만 터키는 이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몸값을 요구했다. 지기스문트는 바다를 통해 가까스로 빠져나와 제타에서 몬테네그로의 귀족인 두라즈 2세에게 흐바르, 코르출라와 함께 계속 터키에 저항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서둘러서 헝가리로 도망쳤다.

이때 브라티슬라바 주판(행정관)이었던 스티보르치 가문의 스티보르와 벡이 많은 포로들을 구출해 헝가리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스만 튀르크는 수개월 동안 헝가리 남부로 진군했다. 그러나 1408년 오스만 튀르크의 공격이 갑자기 중단되었는데, 당시 튀르크는 동부에서 티무르(몽골)와 전쟁 중이었고, 국내는 분란이 일어나서 헝가리를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

헝가리의 북부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1395년 카니쥐의 얀과 옐사프의 레우스타흐가 주도하는 헝가리 군대가 폴란드의 블라디슬라프 2세와 충돌해 승리했다. 폴란드의 블라디슬라프는 루이 1세의 사위였고, 메리가 죽은 뒤에 자신이 헝가리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메리가 임신한 몸으로 말을 타다 낙마한 뒤 죽었기 때문에 블라디슬라프가 헝가리 왕위계승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메리의 사망으로 헝가리에서는 100년간 이어진 앙주 가문의 통치가 끝났다. 더불어 지기스문트가 더 이상 헝가리의 왕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1397년 7월 슈피츠 노바베스에서의 화평으로 갈등이 무마되는 듯했다.


5. 슈클로스 동맹

1400년경 오스만 튀르크의 위협이 잠잠해지자 지기스문트는 헝가리를 제쳐두고 보헤미아와 독일 문제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니코폴리스의 패배 이후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지기스문트를 폐위시키고 투옥했으며, 7월에는 토폴치안스키에서 의회를 열어 헝가리 왕위를 폴란드의 블라디슬라프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이를 이용해 군대를 동원해 슈피츠 부근까지 진군했고, 모라비아의 욥스트와 프로코프도 다시 슬로바키아 서부의 브라티슬라바와 트르나바를 공격했다.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자 귀족들은 지기스문트를 석방하여 다시 왕으로 옹립했고 지기스문트는 슈클로슈 동맹을 통해 귀족들에게 더 많은 특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다. 슈클로슈 동맹은 헝가리의 새로운 집권 귀족 분파를 의미하는데, 슬로베니아 첼레 가문 출신의 귀족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동맹으로 지기스문트는 첼레 가문의 바바라와 결혼했다.

1403년에는 이미 사망한 카렐 2세의 아들인 나폴리의 라디슬라스가 교황과 헝가리 친척들의 지원을 받아 달마치아에서 헝가리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때 슬로바키아 남서부에서 토마스 루다니츠기 주도의 봉기가 일어났다. 7월에는 라디슬라스가 스티보르를 무찌르고 진격했고, 9월에는 보헤미아에서 급거 귀국한 지기스문트마저도 무찔렀다.

지기스문트는 라디슬라스가 교황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헝가리 교회가 더 이상 로마에 어떠한 헌금도 하지 말 것과 교황의 명령을 듣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에 교황은 지기스문트를 파문했고, 지기스문트는 1404년 브라티슬라바에서 의회를 열어 헝가리에서 교황의 권한을 제한했다. 또 헝가리의 교회는 세속 군주가 지배한다는 내용의 선언(Placetum Regium)을 발표했다.


6. 왕실 도시와 남작 협의체

헝가리 귀족들에 의지할 수 없음을 알고 있던 지기스문트는 다른 쪽에서 지원을 받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자유 왕실 도시를 설립해 일종의 도시연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자유 도시를 귀족들에게 넘김으로써 도시의 지원을 받으려던 당초의 계획은 실패했다. 다른 한편 지기스문트는 일종의 남작 협의체를 설립했다. 기사단의 구성원은 처음에는 지기스문트 자신과 부인인 바바라 그리고 22명의 남작들이었다. 이 기사단은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기사단에는 최소 다섯 개의 가문이 참여했는데 중요한 문제를 이들 가문과 논의하고 이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409년 지기스문트는 폴란드에 대항해 튜튼 기사단과도 동맹을 체결했지만, 1410년 7월 15일 그룬발트 전투에서 패배했고 1412년 3월에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411년 지기스문트는 팔츠의 루프레히트가 사망한 이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지기스문트의 딸인 엘리자베스가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와 약혼했다. 당시 알브레히트는 14살이었고 엘리자베스는 고작 2살이었다. 지기스문트는 알브레히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엘리자베스와 알브레히트는 1412년 브라티슬라바에서 결혼했다.

1411년에는 헝가리와 베네치아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고, 1412년에는 지기스문트가 직접 출정했으며, 1415년에는 다시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 패해 보스니아를 빼앗겼다.


7. 콘스탄츠 공의회

지기스문트는 1387년부터 계속된 교회의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 콘스탄츠 공의회를 조직했다. 공의회는 1414년에서 1418년까지 이어졌는데, 여기에서 얀 후스의 화형도 결정했다. 후스의 사망을 계기로 보헤미아에서는 격렬한 반지기스문트 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보헤미아인들이 지기스문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다. 한편 1419년 가을에는 헝가리 남부에서 오스만 튀르크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지기스문트는 1419년에서 1435년까지 보헤미아는 물론 다른 많은 지역에서 후스파와의 전쟁을 치렀는데, 후스파 내부의 갈등이 불거지는 바람에 그들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428년에는 세르비아에서 오스만 튀르크에 패배함으로써 세르비아와 왈라키아를 잃었다.

1428년부터 1435년까지 이어진 후스 전쟁이 슬로바키아로 번지면서 지기스문트는 다시 국내 문제로 돌아왔다. 1430년경 지기스문트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해 있는 브라티슬라바 성을 유럽에서 가장 큰 성으로 개축하고 거처를 이곳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1430년에서 1435년까지 브라티슬라바 성 개축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지기스문트의 계획대로 수도를 옮기지는 못했다.

1433년 지기스문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선출 후 1435년 3월에는 브라티슬라바 의회에서 칙서를 발표하고 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이외에 후스파에 대한 방어 문제도 논의했는데, 슬로바키아 서부 방위를 위해 재산에 따른 세금 징수를 결정했다.

황제로 등극한 지기스문트는 1434년 신성로마제국을 개혁시키려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으며, 1436년에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1437년에는 헤프에서 제국의회를 개최하여 개혁을 논의하던 중 1437년 12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지기스문트 사후 룩셈부르크 가문의 남자 후계가 끊어졌다.

치세 동안 지기스문트는 연이어 여러 적들과 전쟁을 치렀다. 1389년부터는 오스만 터키와 싸웠고, 1395년에서 1412년까지는 헝가리 귀족들과 폴란드 야기엘로 블라디슬라프 2세와 싸웠으며 1403년에는 나폴리의 라디슬라프와, 1419년에서 1437년 사이에는 후스파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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