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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레스 존 제로: 소개, 캐릭터, 게임플레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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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레스 존 제로 绝区零 絕區零 ゼンレスゾーンゼロ Zenless Zone Zero 유통: miHoYo, COGNOSPHERE. PTE. LTD. 플랫폼: PlayStation 5 | Microsoft Windows | Android | iOS | iPadOS 출시일: 2024년 7월 4일 1. 소개 HoYoverse에서 제작한 로그라이트 ARPG. 2. 캐릭터 3. 변조 [S급 신호] 변조 시 획득하는 S급 에이전트의 기본 확률은 0.600%이며, 최대 90회 변조 시 천장을 통해 S급 에이전트를 100% 획득한다. S급 에이전트의 종합 확률(천장 포함)은 1.600%이다. [A급 신호] 변조 시 획득하는 A급 신호의 기본 확률은 9.400%이며, 그중 A급 에이전트의 기본 확률은 7.050%, A급 W-엔진의 기본 확률은 2.350%이다. 최대 10회 변조 시 천장을 통해 A급 혹은 S급 신호를 반드시 획득한다. A급 신호의 종합 확률(천장 포함)은 14.400%이다. 4. 설정 「Bangboo」 작은 체구, 다양한 용도 거리를 걷다가 "웅나나나"라는 소리를 내는 작디작은 형체를 봐도 놀라지 마세요. 이건 뉴에리두만의 풍경 중 하나로 소형 스마트 기기⸺ 「Bangboo」 랍니다. 「Bangboo」 는 성인 무릎 정도 오는 크기이지만, 뉴에리두에서 없어선 안 될 유용한 존재입니다. 오랜 연구 끝에 「Bangboo」 는 사용 용도가 아주 광범위해졌고 다양한 이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특정한 기능을 갖춘 「Bangboo」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장도 많습니다. 「Bangboo」 로 무엇을 할 수 있나요? 「Bangboo」 는 원래 뉴에리두 시민들의 공동 재난 대피를 돕 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뉴에리두 주택가에 공동 재해 가 발생하면 「Bangboo」 는 공용 네트워크에서 재해 정보와 피난 가이드를 수신하여 주변 사람들의 대피를 돕습니다. 최근에는 더욱 발전한 기술과 다양해진 수요로 인해 「Bangboo」 는 단순한 재해 대피용 스마트 기기에

인물: 바츨라프 4세 (Wenceslaus IV)의 생애


  • 왕가: 룩셈부르크 가문
  • 외국어표기: Václav IV  
  • 공식칭호: 바츨라프 4세(Wenceslaus IV)  
  • 별칭: 게으름뱅이 왕  
  • 지역: 보헤미아  
  • 재위기간: 보헤미아 왕(1378년 11월 29일 ~ 1419년 8월 16일), 독일왕(신성로마제국 황제, 1376년 6월 10일 ~ 1400년 8월 20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1373년 10월 2일 ~ 1378년 11월 29일), 룩셈부르크 공작(1383년 12월 7일 ~ 1388년)  
  • 출생 - 사망: 1361년 2월 26일 ~ 1419년 6월 16일  
  • 가족관계: 카렐 4세(Charles IV, 1316년 ~ 1378년), 슈베드니츠의 안나(Anna von Schweidnitz, 1339년? ~ 1362년)  
  • 계보: 전임자-카렐 4세(Charles IV), 후임자-지기스문트(Sigismund)


1. 생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렐 4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는 1361년 2월 26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 58세를 일기로 1419년 6월 16일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바츨라프 4세는 부왕인 카렐 4세로부터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받았고, 독일 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룩셈부르크 공작을 역임했다.

바츨라프는 카렐 4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슈비드니츠의 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파르두비체의 대주교였던 아르노쉬트와 블라쉬미의 얀 오취코에게 교육을 받았다. 부왕인 카렐 4세는 바츨라프가 두 살이 되던 해인 1363년에 그를 보헤미아의 공동 왕으로 세웠고 1373년에는 어린 왕을 위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자리를 차지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카렐 4세는 아들인 바츨라프 4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직접 선제후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물론 바츨라프 4세 역시 보헤미아의 왕으로서 자동적으로 선제후가 되어 황제 선거에서 이미 부자가 두 표를 확보한 셈이었다.

카렐 4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린 아들의 황제 선출을 위해 자신이 황실도시에 부여했던 특권을 박탈하고 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에 불만은 품은 도시들은 카렐 4세가 사망하고 바츨라프가 보헤미아의 단독 왕으로 오른 며칠 뒤인 1376년 7월 4일 슈바벤 도시연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새로 선출된 왕에 대항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뷔르텐부르크 백작 에베르하르트 2세의 영지를 공격했다. 이후 도시연맹의 규모는 계속 커졌고, 1389년까지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가진 국가처럼 활동했다.

그러나 도시연맹의 내분으로 뷔르텐부르크의 에베르하르트 2세가 승리했다. 이 전쟁의 패배로 도시들의 권한은 대폭 약화되었고, 바츨라프 4세는 1389년 헤프에서 도시들 사이의 모든 연맹을 금지하는 동시에 도시의 정치적 자치권을 인정하는 모호한 정책을 내놓았다. 이를 통해서 향후 수십 년 동안의 안정기가 도래했지만 도시는 이제 더 이상 황제권의 기반이 되지 못했다.


2. 귀족들의 반란과 종교 개혁

바츨라프 4세는 오랫동안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특히 로젠부르크 가문이 주도하는 보헤미아의 귀족들과의 잦은 마찰로 권력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바츨라프 4세는 두 번이나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츨라프가 강력한 왕권을 확보할 수 없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의 가문 때문이었다.

선왕인 카렐 4세는 자신의 영토를 아들과 친척들에게 분할했는데, 바츨라프 4세가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지했음에도 이복동생인 지기스문트가 브란덴부르크를 상속받았고, 이르지는 고지대 루사티아의 괴를리치를 차지했다. 사촌인 욥스트와 프로코피우스는 모라비아를 분할해 상속받았고, 삼촌인 바츨라프 1세는 룩셈부르크의 공작이 되었다. 따라서 어린 바츨라프는 부왕인 카렐 4세가 누렸던 그 어떤 자산도 물려받지 못한 셈이었다. 한편 1386년 이복동생 지기스문트가 헝가리 왕이 되면서 점점 더 보헤미아의 내정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츨라프는 보헤미아의 귀족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프라하 대주교 옌슈타인의 이르지와도 갈등을 겪고 있었다. 클라드루비 수도원장 임명을 둘러싼 갈등과 1393년 대주교의 대리 법무관이 고문을 받아 죽은 사건으로 인해 대주교는 바츨라프에게 정면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바츨라프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여기에 개입해 휴전을 조정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바츨라프는 지기스문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교회의 분열 속에서 바츨라프는 교황 우르반 6세를 지지했다. 동시에 보헤미아의 왕으로서 종교 개혁가인 얀 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교도라는 이유로 탄압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들을 지켜주려 했다. 이에 반발한 많은 독일인들이 프라하를 떠났고, 프라하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라이프치히에 새로운 대학을 설립해 이주했다. 1415년 후스가 콘스탄츠에서 화형을 당하면서 프라하 제1차 창외투척사건이 발생했고 이제 보헤미아는 후스파가 점령하는 ‘이단의 땅’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3. 게으름뱅이왕?

보헤미아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바츨라프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갖지 않았고, 오랫동안 독일에 가지도 않았다. 이에 뉘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제국 의회가 반발했고, 4명의 선제후인 팔라틴 백작 루프레히트 3세,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가 공공의 평화를 유지하지 않고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바츨라프를 비난하였다.

선제후들은 바츨라프에게 자신들 앞에 나아와 사태를 해명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바츨라프는 이를 거부했다. 선제후들은 1400년 8월 20일 라흐넥 성에서 모임을 갖고 바츨라프가 제국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게으르며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서 폐위시켰다. 다음 날 선제후들은 팔라틴의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를 황제로 선출했다.

1402년 동생인 지기스문트와 체코 귀족들은 바츨라프를 또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1403년 바츨라프는 당시 미쿨로프 영주였던 리히텐슈타인의 존의 도움으로 빈의 감옥에서 탈출해 모라비아의 성에 은신했다. 당시 루프레히트가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교회의 분열이었는데, 황제에 오른 뒤인 1409년 피사 공의회를 소집해서 안티-교황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다. 이로써 1409년에서 1417년까지 세 명의 교황이 공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410년 루프레히트가 사망한 뒤 새로이 선출된 황제는 바츨라프의 사촌인 모라비아의 욥스트와 바츨라프의 동생인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양편으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았다. 바츨라프는 여전히 자신의 황제 폐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1411년 욥스트가 죽은 뒤 바츨라프는 자신의 폐위를 인정하면서 보헤미아의 왕위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1411년 지기스문트가 독일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바츨라프는 대단히 지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치세 동안 많은 혼란을 불러왔기 때문에 ‘게으름뱅이왕’으로도 불린다. 한편 성 네포묵을 시해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잔혹한 측면도 있었다. 아버지인 카렐 4세와는 달리 바츨라프는 특정 그룹을 편애하고 중용함으로써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더욱이 그는 술을 많이 마셔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는데, 술에 취해서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초청한 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419년 바츨라프는 사냥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에 보헤미아 왕국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거의 20년 동안 가톨릭과 후스파 사이의 종교 전쟁에 시달렸다. 바츨라프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째 부인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요안나였다. 요안나가 죽은 뒤에는 요안나와 사촌지간이었던 바바리아의 소피아와 결혼했지만 후사를 보지 못했다.


4.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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